사람이란 발생한 원인을 분명하게 해석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치게 되면 대뜸 음모론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까닭에 9.11 미국 동시다발 테러를 일으킨 것은 오사마 빈라덴이 선물옵션으로 막대한 수익을 얻기 위해서였다는지, 영국 다이애너 황태자비의 사고사는 영국황실의 음모라든지 하는 식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지곤 한다.
음모론이 등장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
이번 버지니아 총격사건과 같은 희대의 사건에 음모론이 등장하지 않을 리가 없다. 사건 초기부터 포탈 뉴스에는 음모론을 시사하는 근거 없는 댓글이 달리곤 했다. 사실 이번과 같은 희대의 사건에 음모론이 등장하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음모론이 너무나 횡행한다. 주류 언론이라는 것들이 대놓고 황색저널리즘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가 진전되는듯 하면 으레 이면 합의설이 나오고 외국인이 반복해서 주식을 사들이면 유태자본 음모론이 고개를 내민다.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과거 DJ가 주장했던 개표방송조작은 통계의 기초지식만 있어도 웃어넘길 일이었지만 그것을 특집으로 다룬 월간지조차 있었다. 전자개표 조작설을 주장했던 사람들 역시 다를 바가 전혀 없다. 황우석교수를 둘러싼 음모론은 너무 삼류 코미디같아 말하기조차 역겹다.
왜 우리사회에 이렇게 음모론이 횡행하게 되었을까? 정치와 언론을 공작 대상으로 삼던 군사정부 시절의 잔재일까? 아니면 우리사회 구성원에 음모론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권위주의적일수록 음모론을 좋아한다
우리 사회가 음모론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권위주의적이라는 데에 있다. 물론 겉보기에 우리 사회는 권위주의에서 상당히 탈피했다. 그러나 간간히 터져나오는 대학생들의 체벌과 폭력 사건을 보더라도, 가장 자유로워야 할 대학생의 의식세계조차도 아직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고등학생 머리가 규정보다 1센티 길다고 애들에게 개지랄떠는 것이 우리사회이다. 이런 사회가 권위주의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느 사회가 권위주의일까?
직장생활은 더 말할 나위없다. 다 큰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부하직원을 “철수야”, “길동아”라는 식의 이름으로 부른다. “얘, 쟤”하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 역시 너무나 당연하다. 또 그렇게 불러줘야 친근감을 느낀다는 넘들까지 있다고 하니, 이건 완전 사도-마조의 복합세계이다.
다음과 같은 권위주의적 인간의 성격을 보면 우리 사회가 여전히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 수 있다. 권위주의적 인간이란 보통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준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는 데 반해 다른 집단들을 지나치게 깔보고 경멸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한민국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줄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인간임에도 단지 못산다는 한 가지 이유로 동남아나 아프리카 사람은 물론 같은 민족이라는 중국교포들조차 발의 때만큼도 여기질 않는다.
센 넘에게는 약하게, 약한 넘에게는 강하게
이러한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굴종적이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위력을 과시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요즈음 강하다는 미국의 심기를 거스릴까 안절부절 못해 스스로 참회하고 회개한다. 일국의 주미대사라는 넘이 밥 굶자고까지 주절거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 경제에 오히려 도움이 되는 동남아시아의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최악의 인권유린도 서슴지 않는다. 오죽하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와서 처음 배우는 말이 “때리지 마세요”일까.
또한 권위주의 적인 사람일수록 외면적인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사람사이의 인간관계를 지배-복종을 기준으로 하는 힘의 관계에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성형수술과 명품이 판을 치고, 대형차가 잘 팔리는 것이다. 내면 그까짓 거는, 엿이나 바꿔먹으라는 식이다.
근자의 연구로 권위주의적 인간일수록 인지적으로 애매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그 결과 권위주의적인 인간은 모든 일을 흑백논리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 회색을 용납하지 못한다. 이것 군대 생각하면 저절로 이해된다. 예스냐 노만 인정되는 사회,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애매하면 이해 못한다
따라서 버지니아 총격 같은 사건에서도 애매한 부분을 못 받아들인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어 하질 않는다. 사건이 심각할수록 거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모르기는 피차 마찬가지인 우리나라 언론이 이것저것 긁어 대다보면 애매한 부분은 증폭되기 마련이다. 모든 사건에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이 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권위주의적 인간은 조금이라도 애매한 부분이 있으면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보다 명료한 이해를 위해 음모론이라는 블랙박스를 집어넣은 해석을 선호한다. 사실 어떠한 사건이라도 음모론적으로 해석하면 단순명쾌, 일목요연해진다.
따라서 권위주의적인 사람일수록 이러한 해석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만이 마음의 위안을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면 그렇지”하고 스스로 납득하고 좋아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사회에 음모론이 횡행하는 가장 큰 심리적인 이유이다.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이해할 뿐
두 번째로는 wishful thinking이라는 것이 있다. 희망적 사고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이려는 사고방식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증거만을 우호적으로 해석해, 스스로의 마음을 위안하려는 얄팍한 사고방식이다. 불리한 정보는 서슴지 않고 무시해버린다.
이번 버지니아 총격사건에는 wishful thinking을 촉발할 요소가 대단히 많았다. 대표적으로 조승희군이 어린 나이에 이민을 갔으면서도 여전히 한국 국적을 가졌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미국인이었다면 지금과 같은 식의 반응은 절대 나오지 않았다. 한국계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미국국적을 가진 엄연한 미국인이므로 미국사회의 문제로 완벽하게 돌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번에는 이것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우리는 효순이, 미순이 사건으로 크게 한탕 해먹은 전력이 있다. 효순이, 미순이 사건과 이번 조승희 사건은 성격이 다르다고 강변할 것이다. 물론 다르다. 하지만 사건을 단순하게 놓고 보면 하나는 미국 군인이 우리나라 여중생을 죽인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인이 미국인을 죽였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회적인 맥락은 다를지 몰라도 본질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을 이용해먹으려는 세력에게 맥락은 중요하지 않다. 한국인이 미국인을, 그것도 32명씩이나 죽였다는 것을 강조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자고로 선동이란 것에는 수식어가 안 붙을수록 좋다,
정신적인 DDR,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할 때
우리는 효순이, 미순이 사건으로 한탕 해먹었으면서, 미국은 조승희 사건으로 크게 한탕 해먹으면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할 자격이 전혀 없다. 또 우리는 그걸 잘 알고 있다. 우리에게도 최소한의 양심 정도는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과 같이 우리사회가 자발적으로 참회와 회개 모드에 빠져있다. 스스로 알아서 기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제발이 저린 데에서 나오는 반응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조승희는 살인자가 아니어야 한다. 살인자가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 그러다보니 조승희군이 살인자가 아니라 오히려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증거에만 눈이 간다. 또 그것이 더 그럴 듯 해 보인다. 그렇게 생각해버림으로써 자기 마음속의 혼란을 지워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조승희군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줄 수 있는 증거에만 눈을 주고 또 믿고 싶어 하고 있다. 이런 것들 다 부질없는 정신적인 DDR일 뿐이다. 대한민국, DDR 끊을 나이 이미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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